새벽이슬교회

새벽이슬교회, 히브리서 강해 10 (히 1:7), 윤해규 목사, 2026.08.09

새벽이슬교회 · 2026-08-10
설교큐티 — 주일 설교로 하는 6일 QT
본문
시편 104

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광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를 입으셨나이다 2.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3.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4.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5.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요동치 않게 하셨나이다 6. 옷으로 덮음 같이 땅…

설교자
새벽이슬교회
날짜
2026-08-10
설교 길이
71 분
설교 영상 재생
요약

오늘 히브리서 1장 7절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임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사역자일 뿐, 그들의 본질과 한계를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다른 중재자를 찾으려 하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의 권위를 붙잡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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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구절
설교 구조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함을 깨닫자
1
천사의 본질과 한계
천사는 하나님의 도구일 뿐이다
히브리서 1:7
2
우상숭배의 본질
우상은 인간의 본성에서 나온다
골로새서 3:5
3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 역할
예수만이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디모데전서 2:5
4
오직 성경의 중요성
성경이 진리의 기준이다
히브리서 1:1-2
5
신앙의 중심을 잃지 말자
중심이 흔들리면 신앙도 흔들린다
시편 119:105
6
세상의 유혹과 싸우기
세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자
에스겔서 14:3
◆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에 의지하자

이번 주일 설교로 만든 6일 묵상입니다 —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하루에 하나씩.

이번 주 말씀히브리서 1:7 -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1
월요일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
오늘의 본문히브리서 1:7

천사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사역자들로, 그들의 본질과 한계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것 위에 우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스스로에게내가 예수님 외에 다른 중재자를 찾고 있지는 않은가?
오늘 실천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기도하며,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겠다고 다짐해본다.
기도주님,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다는 믿음을 주옵소서.
2
화요일
우상 숭배의 경계
오늘의 본문골로새서 2:18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직접 만나기 두려워하며 다른 중재자를 세우려는 유혹에 빠집니다. 이는 우상 숭배의 뿌리가 됩니다.

스스로에게내 마음속에 세운 우상은 무엇인가?
오늘 실천하나님을 직접 만나기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본다.
기도하나님, 제 마음속의 우상을 제거해 주시고, 오직 주님께 나아가게 하소서.
3
수요일
말씀의 권위
오늘의 본문디모데전서 2:5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중보자라는 사실은 성경의 권위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그 진리를 깊이 새겨야 합니다.

스스로에게내가 말씀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는가?
오늘 실천오늘 말씀을 읽고, 그 내용을 다른 사람과 나누어본다.
기도주님, 말씀의 깊이를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4
목요일
신앙의 중심
오늘의 본문시편 119:105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길을 비추는 등불입니다. 말씀 없이는 방향을 잃고 방황하게 됩니다.

스스로에게내 신앙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
오늘 실천하루에 한 구절이라도 말씀을 암송해본다.
기도주님, 제 삶의 중심이 오직 말씀에 두게 하소서.
5
금요일
체험과 말씀의 균형
오늘의 본문히브리서 1:1-2

체험이 말씀의 권위를 넘어서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진정한 성령의 역사는 말씀과 일치해야 합니다.

스스로에게내가 경험한 신앙의 체험이 말씀과 일치하는가?
오늘 실천최근의 신앙 체험을 말씀과 비교해보는 시간을 갖는다.
기도하나님, 제 체험이 말씀에 근거하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6
토요일
세속적 우상 경계
오늘의 본문골로새서 3:5

세속적인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려 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잊고 살아가게 됩니다.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스스로에게내가 세속적 가치에 휘둘리고 있지는 않은가?
오늘 실천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에 감사하는 시간을 가져본다.
기도주님, 세속적 유혹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소서.
말씀 확인 퀴즈

이번 주일 말씀에서 뽑은 5문제입니다. 보기를 눌러 정답을 확인해 보세요.

  1. 히브리서 1장 7절에서 천사들의 본질과 한계를 설명하는 구절은 어떤 내용인가요?
  2. 설교에서 언급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성은 무엇인가요?
  3. 성경의 권위가 무너지면 어떤 결과가 발생한다고 설교에서 언급되었나요?
  4. 설교에서 언급된 '우상숭배'의 본질은 무엇인가요?
  5. 설교에서 강조된 '오직 성경'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전체 스크립트

오늘은 히브리서 강의 열 번째 시간으로 1장 7절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로 충분해야 합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며, 열 번째 시간 주시는 은혜를 함께 크게 바꾸자 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6절을 통해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경배할지어다"라는 장엄한 음명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선포를 이어받아 오늘 본문 7절은 구약 시편 104편 4절을 인용하며 천사의 본질과 한계를 명확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천사를 예수님과 비교하는 이유는 결코 천사를 높이려고 하는 목적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하심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1세기 유대교 안에는 천사에 대한 강한 관심과 숭배의 전통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이 천사들을 통해 전달되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난 공동체 문헌에서는 천사들을 하늘의 성전에 예배를 주관하는 신적 존재처럼 높였습니다. 골로새서 2장 18절에도 사도 바울이 경고했듯, 초대교회의 성도들 중 일부는 실제로 천사 숭배에 빠져들었습니다. 로마의 박해와 시련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흔들렸던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천사는 결코 멀리 있는 추상적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만으로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 눈앞에 단장 화려하고 강력해 보이는 더 확실한 중재자로 마음을 끌어당기기에 매력적인 유혹의 대상이 천사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천사를 숭배하고 매력적으로 마음이 끌렸던 이유는 천사들의 환상이나 눈부신 기적, 초자연적인 능력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 104편 4절을 인용하며 천사의 위치를 정확하게 교정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7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바람으로 잡으셨다는 것은 빠르게 움직이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독립권 없이 수정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또 천사들을 사역자들, 즉 신부름꾼들이라고 부르시면서 불꽃으로 삼으셨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심판과 보호의 강력한 도구에 불과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천사들이 보이지 않는 바람처럼 시공간을 초월해 움직이고, 모든 것을 태울 불꽃처럼 강력한 능력을 발휘한다 해도 본문에 보면 "삼으시느니라"라는 단어 하나로 천사의 한계를 분명하게 규정해 주고 있습니다. 천사는 아무리 위대한 바람 같고 불꽃 같아 보여도 그들은 스스로 존재하는 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해 지음받고 부려지는 도구이자 신부름꾼, 즉 종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바람을 쓰시면 바람이 되어야 하고, 불꽃으로 쓰시면 불꽃으로 타올려야 하는 철저히 주인의 뜻을 수행하는 하나님께 사용되어지는 종들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7절 말씀이 그럼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왜 이 메시지가 중요하기에 이 말씀을 하고 계실까요? 오늘날 성도들이 천사 숭배라는 옛 모습으로 돌아가지는 않더라도, 인간의 마음속에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직접 나가기에는 부담스러우니 나와 하나님 사이에 그 무언가 다른 중재자를 세우고자 하는 본능적 성향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 개혁자 존 칼빈은 그의 저서 기독교 강요에서 인간의 마음을 끊임없는 우상을 만들어내는 공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상숭배는 특별히 악한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타락한 인간 본성 자체에 뿌리 내린 보편적 성향이라는 것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이 성향이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방식으로 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여호와의 즐기라고 부르며 예배했듯이, 우상숭배는 종종 하나님께 나아가는 통로를 내 생각대로 만들려는 시도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본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이 성향은 시대를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구약에서는 눈에 보이는 형상과 이방 신들로 나타났으며, 중세 교회사에서는 성인 숭배, 유물 숭배로 나타났고, 그리고 오늘 우리 시대에는 훨씬 더 세련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의 뿌리는 언제나 동일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한 번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엄밀한 불신 때문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우상은 크게 두 가지 모습으로 작동합니다. 이것이 개혁 신앙이 오직 그리스도를 겉으로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본능적으로 중재자를 더하려 하기 때문에 교회는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충분하다라고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과 중보의 유일한 통로임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2장 5절에 보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중보자시라는 것이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오직 성경의 증언을 통해서만 그 사실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반드시 오직 성경을 붙들었습니다. 오직 성경은 계시의 유일한 최종 권위를 지킵니다. 성경 외에 어떤 새로운 계시나 전통, 신비 체험이 그와 동등한 권위를 가질 수 없다라는 원칙입니다. 그것이 오직 성경입니다. 이 두 원칙이 왜 그토록 중요하냐 하면, 이 원칙이 무너지면 사람들은 반드시 그 빈자리를 다른 중재자와 다른 권위로 채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는 부족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중재자, 다른 권위로 가진 무엇인가를 가지고 그 자리를 채우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집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집에 중심을 잡아주는 대들보가 빼버려지면 집이 통빈 채로 안전하게 있을 수는 결코 없습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그래서 여기저기 임시 기둥들을 세우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임시 기둥들은 대들보만큼 견고하지 않기에 결국 시간이 지나면 삐걱거리고 흔들리고 집은 무너집니다. 우리 신앙도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말씀이라는 하나의 경관 기준이 흔들리면 우리는 결코 아무것도 믿지 않는 통빈 상태로 남지 않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하여 여기저기에서 임시 방편의 기준들을 내가 끌어다 당깁니다. 그것이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뭐냐? 하나님을 안 믿는 우상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다른 것으로 하나님을 대치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려운 결정 앞에서는 교인이 만약 말씀과 기도로 나가는 습관이 흔들리고 있다면 그 사람은 유명한 분의 책에서 "이런 분이 이런 말씀을 이렇게 말했다"라고 하거나, 유명한 강사가 유튜브에서 "이런 조언을 하더라"라고 하거나, 친한 지인이 "이렇게 말하더라"라고 하며 여러 곳을 기웃거리게 됩니다. 요즘에는 AI에 기웃거리게 되기도 합니다. 이 사람은 신앙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전히 교회에 다니고 예수도 믿습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순간에 그 마음을 실제로 이끄는 것은 하나의 확고한 중심이 아니라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르치는 여러 목소리라는 것입니다. 왜요?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인생의 중심에 자기 인생을 받쳐주는 대들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빠지니까 여기저기에서 내 인생을 세우려고 기웃거린다는 것입니다.

그 넌 그렇지 않은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려움이 오자 예수 그리스도를 부족하다고 여깁니다. 천사를 숭배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 얘기가 아닌 것처럼 보이죠. 오늘은 교묘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또 다른 천사를 숭배하고 싶어 하는 우리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하나의 중심을 잃었을 때 아무것도 믿지 않는 중립적 상태로 남지 못할까요? 인간은 본질적으로 무언가를 신뢰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은 진공 상태를 결코 견디지 못합니다. 무언가로 반드시 그 자리를 채우고야 맙니다. 그래서 참된 중심을 놓아버린 사람은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고 더 불확실한 기준들의 노예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의 확실한 북극성을 잃어버리면 수십 개의 반짝거린 별들 사이에서 방향을 잃고 헤매는 배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4장 3절에 보면 "말세가 되면 스승을 많이 둔다"는 말이 옵니다. 한 사람을 두는 것이 아니고 많은 스승을 둔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 지점을 정확히 짚어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아무 스승도 없이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의 스승을 동시에 두고 이리저리 옮겨 다닙니다. 진리는 하나인데 여러 기준을 동시에 따르다 보면 결국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골라듣는 신앙이 되어버립니다. 기준이 없다는 겁니다. 무엇이 기준인지 모릅니다. 뭡니까? 내 귀에 듣기 좋으면 곧 그것이 기준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 105절은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멘. 이 말씀은 우리의 마음에 담지 않는 신앙은 결국 대들보가 빠진 집과 같은 인생이 되어버립니다. 등불은 여러 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확실한 등불이면 어두운 길도 안전하게 걸어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기준을 모으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많은 인생의 집을 받쳐주는 대들보를 모으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주어진 하나의 확실한 대들보, 확실한 등불, 하나님 말씀이면 족합니다. 그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이것저것을 기웃거릴까요? 말씀을 듣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교회만 다니지 말씀을 듣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교회에서 말씀은 듣지만 그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다른 곳에 진리가 있는가 싶어서 이것저것 묻습니다. 오늘 AI 시대는 더 많이 묻지 않습니까? 한 곳만 묻는 것이 아니고 이곳 저곳 다 묻지 않습니까? 하나님 말씀이 진리가 되지 못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무서운 시대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오직 성경 같은 문제를 서로 다른 두 영역에서 지키는 원칙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영역으로, 누가 나를 하나님께 데려다 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의 답입니다. 그 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직 성경은 계시의 영역으로, 내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무엇을 믿고 따라야 하는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답은 오직 성경입니다. 즉 하나는 나아가는 길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길을 아는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만약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있고 오직 성경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한 번만이 우리의 구원하는 중보자시다라는 고백을 하려면 그 사실이 어디에서 알게 되는가라는 질문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이심을 아는 것은 전적으로 계시인 성경의 증언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성경 외에 다른 권위, 즉 전통, 개인적 신비 체험, 특정 지도자의 계시가 성경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 권위를 갖게 된다면, 그 다른 권위는 얼마든지 사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중보자가 필요하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역사적으로 그렇게 진행돼 왔습니다. 중세 교회에서 성경 외에 전통과 교권이 강조되면서 자연스럽게 성인들과 마리아를 통한 중보, 사제를 통한 고해 성사 등 예수 그리스도 외에 중보자들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경이 없었기 때문에. 성경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즉 오직 성경이 무너지면 반드시 오직 예수 그리스도도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성경 안 봐도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사단의 속임수입니다. 알지 못한 어떻게 잘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오직 성경이 무너지면 반드시 오직 예수도 무너집니다. 그래서 오직 성경이 아닌 것입니다. 다른 것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이 외친 것은 "오직"입니다. "온"입니다. 오직 예수, 오직 성경. 그 위에 어떤 것도 우리의 구원에 진리를 아는 일에 기준이 되어질 수 있는 것은 없다라는 것입니다. 아멘. 오직 성경이 무너진다면 반드시 오직 예수 그리스도도 함께 무너지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중보자시라는 사실 자체가 성경이라는 하나의 권위 있는 증언의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길을 보여주는 지도요. 예수 그리스도는 그 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길을 보여주는 지도입니다. 그런데 그 길 자체가 누구냐?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겁니다. 이것은 둘 중 하나가 없으면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 외에 다른 권위가 끼어드는 순간 그 다른 권위는 얼마든지 예수 그리스도 곁에 다른 중보자를 세울 수 있는 문을 열어 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성경뿐 아니라 교회의 전통도 동등한 권위를 가진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전통 권위 아래 발전한 것이 바로 마리아와 성인들에게 기도하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관습입니다. 그리고 사제를 통하지 않고는 죄사함을 받을 수 없다라는 고해 성사 제도, 연옥감 면접을 통한 구원의 보충 장치, 이 모든 것은 오직 성경이라는 원칙이 흐려지면서 자연스럽게 자라난 열매인 것이었습니다. 성경뿐만 아니라 교회도 그 동등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가 뭔가를 말하면 그것은 곧 성경의 권위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그런 말씀이 없어도 교회가 그렇게 말했다면 그 권위를 가질 수 있다는 겁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오직 성경만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오늘도 목사님이 이렇게 이야기하던데, 이것은 성경이 모르면 100번 속을 수 있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관님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대요. 여러분, 성경이 모르면 얼마든지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참인 줄 알아요. 그래서 무슨 문제만 생기면 내가 하나님 앞에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그분에게 찾아갑니다. 그분이 나의 중보자입니다. 왜 그럴까요? 오직 성경이 없어서 그런 겁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 오직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그냥 대충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2,000년 기독교 역사를 보면서 깨달아야 된다는 사실을 오늘 말씀을 통해 받아들일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중세 카톨릭 교회에서 일어났던 이 모든 것이 오직 성경이라는 원칙이 흐려지면서 자연스럽게 자라난 열매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오직 성경이라는 권위가 무너지면 교회 안에 이상한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믿는다는 이름으로 예배라는 이름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들이 오직 성경을 외치며 성인 숭배와 유물 숭배, 그리고 전 교회 전통이 성경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권위를 갖는 것에 맞서 싸운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습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을 하였던 것입니다. 캐치프레이즈는 "오직 성경,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멘. 성경 하나의 권위로 돌아가야만 성경이 실제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도 한 번만으로 충분하다는 진리가 온전히 회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교회 나와도 괜찮다라고 합니다. 예배드려도 괜찮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믿지 말라라고 합니다. 다른 것을 내 중심에 덧붙들고 살아라고 합니다. 그것을 사단은 전혀 겁내지 않습니다. "너 교회 가구나. 나 너무 걱정돼."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오직 예수인가? 그가 오직 성경인가? 이것을 두려워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단이 두려워하는 진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주님 축복합니다.

히브리서 1장이 정확히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옛적에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시다가 이제 아들을 통하여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 이후에는 더 이상의 계시도, 더 이상의 중재자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천 년 기독교 역사 속에서 아들 이후에 지금도 계시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직접 계시를 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그게 진짜 계시일까요? 또 다른 중재자를 세우고 나가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즉 예수 그리스도만의 중보자라를 말하고, 오직 성경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어디서 확인하는지를 말합니다. 이 두 개의 기둥은 같은 진리를 지키는 두 개의 기둥과 같아서 하나가 무너지면 다른 하나도 결국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은 이 둘을 항상 함께 붙들었습니다. 그의 신앙을 붙들고 살아가는 개혁 신앙을 가진 오늘 우리도 오직 예수, 오직 성경, 이것을 동시에 붙들고 살아가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 안에서 은사와 체험을 절대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 또한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개혁 신학은 성령의 사역과 은사를 결코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체험 자체가 말씀의 권위를 넘어서거나 대체하는 것을 경계한다는 겁니다. 어떤 것도 말씀의 권위에 둘 수가 없다라는 겁니다. 내가 어떤 체험을 했다 하더라도 그 체험이 말씀의 권위보다 더 세워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체험했다는 것이 말씀의 권위보다 더 세워질 때가 얼마나 많은지 오늘 우리는 많이 볼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개인적 확신이 성경 해석과 교회의 분열을 뛰어넘는 최종 기준이 될 때, 이는 엄밀히 오직 성령의 원리를 뒤흔드는 위험한 것입니다. 진정한 성령의 역사는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성경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성령은 우리를 이끌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진짜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고 성령이 주신 은사를 가진 자들은 그 중심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높입니다. 왜요? 성령은 진리 되시는 그분께로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다른 중재자는 종교적인 형태로만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질, 명예, 출세, 직위, 이런 것들도 똑같은 뿌리에서 나오는 우상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 5절에 보면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 우상숭배가 될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상숭배라고 말씀했습니다. 탐심이 우상숭배와 동일시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서 14장 3절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드리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우상이 물리적 형상이 아니라 마음속에 세워진 궁극적 신뢰와 애정의 자리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우상을 어디에 드린대요? 마음에 드리는 거. 마음에, 마음에 탐심이 어디서 나오죠? 마음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팀킬러 목사님도 그에 지어서 "내가 만든 신"에서 현대인의 가장 강력한 우상은 대부분 종교적 형태가 아니라 성공, 돈, 권력, 인정, 안정과 같은 것들이다라고 정확하게 지적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천사를 숭배하고 싶을 만큼 매력적으로 마음이 끌렸던 이유는 환상이나 눈부신 기적,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는 천사들의 신비로운 모습에 마음이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바람과 불꽃처럼 천사들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마음이 동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눈앞에 화려하게 펼쳐지는 기적과 초자연적인 형상에 매력된 나머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보좌 우편에서 우주를 다스리는 예수 그리스도는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오늘 우리에게 영적으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이 아닌데, 단장 눈앞에 보이는 것, 단장 손에 잡히는 것, 단장 내 눈에 사로잡히는 매력적이고 화려한 것에 마음을 뺏겨서 예수님을 잊은 채 살아간다는 겁니다. 겨우 한 번 예배 자리 나와서 말씀을 들을 때 "예수"라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지 모르겠지만, 일주일 한 번의 삶 속에 모든 것이 내 삶을 움직이고 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바로 단장 눈에 보이는 것들, 단장 손에 잡히는 것들, 단장 내 눈을 사로잡는 매력적이고 화려한 것들이었습니다.

영원하신 왕 예수 그리스도보다 잠시 다 사라질 세상의 바람과 불꽃 같은 돈, 출세, 인정, 성공, 그리고 사람의 영향력을 더 붙들고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 안 믿는 거 아닙니다. 그런데 내내 중심의 자리는 예수님의 보좌보다 그 보좌가 훨씬 강력하게 앉아져 있다는 겁니다. 세상은 언제나 천사처럼 눈에 보이는 화려한 스펙을 가진 사람, 바람처럼 빠르게 성취하는 사람, 불꽃처럼 주목받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게 만듭니다. 믿는 자들도 이 세대를 본받으려고 길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는데, 이 세대를 본받으려고 길을 쓰고 기도까지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녀들을 신앙으로 신앙을 뒤로 물려가면서까지 세상에 주목받는 사람으로 키우려고 애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정도의 물질과 이 정도의 지위가 있어야, 이 정도의 외모가 되어야 진짜 안전하다고 믿기에 우리는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이 있어야만 존재 가치를 확인받는다고 믿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차지해야 할 그 마음의 보좌를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차지해야 할 그 마음의 자리에 이 세대를 본받는 것을 부모가 넣어주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는 바람 같고 불꽃 같은 그런 화려한 스펙들, 그런 성취를 우리도 눈독이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추구하고 싶다는 겁니다. 그것을 갖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보다 그것을 두고 자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믿기보다 그것을 내 인생을 지켜줄 것으로 믿고 붙들고 살아간다는 겁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칼빈은 인간의 마음은 우상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공장이라고 했는데,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우상은 두 가지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중재자 우상입니다. 하나님께 직접 나가는 것이 두려워 사이에 세우는 종교적 매체들입니다. 과거의 천사, 마리아, 성인 숭배로부터 오늘날 말씀보다 은사나 특정 영적 지도자나 점술, 점성술이나 사주 등이 이에 해당됩니다. 여러분, 교회 다니는 사람이 사주 보고 점 보러 가는 것이 없습니까?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게 어제 어른 일이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 한 번만으로 족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이 노골적으로 점 보러 간다는 겁니다. 새벽이슬교회에 이런 분이 한 분도 없기를 주님으로 축복합니다.

둘째는 신뢰 대상형 우상입니다. 하나님이 차지하셔야 할 마음의 보좌를 대신 차지하는 세속적 대상들입니다. 돈, 출세, 지위, 자녀 성공, 외모, 인정, 그리고 건강과 같은 것들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바람처럼 빠르게 성취하고 불꽃처럼 주목받는 스펙을 가진 사람들을 부러워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많은 크리스천조차도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자기 자녀들까지 세상에 주목받는 불꽃으로 빠르게 출세하는 바람처럼 스펙을 쌓으며 키우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 두 우상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공통된 심리적 뿌리가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 플러스 알파를 여야 한다는 겁니다. 오직 예수로 안 된다는 겁니다. 플러스 알파가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한 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엄밀한 불신과 그 자리를 다른 무언가로 채우려는 시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플러스 알파의 구조가 위험한 이유는 겉보기에는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종처럼 "나는 예수를 믿지 않는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물론 예수를 믿지만 그래도 이것은 있어야 해. 그래도 이 정도는 있어야 안심이 돼."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그것만으로 내 인생이 살아가는 데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플러스 알파는 매우 다양한 얼굴로 각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삶에도 나타나고 구원에도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가 육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필요들을 당연히 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겁니다. 그거 구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구하는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족하지 않다는 것에 세워진다면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만으로는 이 땅을 살아가는 데 절대 부족하다는 겁니다. 말씀만으로는 절대 부족하다는 겁니다. 플러스 알파는 매우 다양한 얼굴로 각 사람의 성향에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런 분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의지하려는 대상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돈이요, 사람이요, 인맥입니다. 이것을 찾으러 다닙니다. 이것을 구하러 다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는 족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분에게는 기도가 없습니다. 엎드려서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가 없습니다. 구원도 예수 그리스도만 충분하지 않다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나름 행위로 뭔가 채워져야 한다라고 여깁니다. 자기 생각에 알파가 부족하다고 여겨서 늘 구원의 확신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은 충분하지 않아요.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은 충분하지 않다는 겁니다. 플러스 알파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플러스 알파가 아직 내가 안 채워져서 그래서 내가 구원의 확신이 없다는 겁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이 알파가 채워지지 않을 때 찾아오는 감정이 불안이라는 것입니다. 불안. 진짜 신뢰의 대상이 흔들릴 때 우리는 불안해집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없으면 나는 불안하다는 감정의 지도를 그려보는 것이 내 마음의 실제 예배 대상을 찾는 매우 정직한 방법입니다. 여러분, 예배드리지 않으면 불안하십니까? 돈이 떨어지면 불안하십니까? 내 호주에서 돈이 떨어지면 불안하십니까? 오늘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 불안하십니까? 내가 무엇을 더 의지하고 있다는 가벼운 진단입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충분하다면 다른 것의 상실이 슬픔이나 불편은 될 수 있어도 내 존재의 뿌리를 흔드는 불안이 되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충분하지 않으면 돈이 떨어지면 불안합니다. 건강이 어려운 진단이 오면 불안합니다. 내 인생 존재 자체를 불안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것은 내가 무엇을 내 중심에서 전적으로 신뢰하고 붙들고 있었던 내 중심의 보좌라는 것을 내가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병원에 가서 극한 진단을 받으면 슬프지요. 마음이 아프지요. 그러나 살아가는 동안에 불편하지, 그것이 내 인생 존재를 흔드는 불안으로는 여겨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비즈니스를 하다가 부도날 수 있죠. 그러나 그것이 내 존재 자체를 흔드는 불안으로 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슬프고 불편하고 전에처럼 그런 집에서 살지 못하고 그런 차를 타지 못하고 불편하고 좀 그런 것은 있지만 내 존재 자체를 흔드는 불안. 그래서 공황 장애가 오고 약을 먹어야 되고 잠이 안 나서 우울증이 오고 그러진 않는다는 겁니다. 불안해하는 반사적 본능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고백하는 신앙보다 훨씬 정직합니다. 우리는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전부라고 노래하면서도 실제 위기 순간에는 전혀 다른 곳으로 내 마음이 먼저 달려가는 경우가 많지 않느냐는 겁니다. 이 간극을 정확하게 인정하는 것 자체가 회개의 시작입니다. 하나님, 내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내가 예수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한 번만으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떨어지고 이것이 부족하고 이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늘 불안해 왔습니다. 그래서 이것에 더 목숨을 걸고, 이것을 위해서 내가 예배를 드리고,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 열심을 내는 흉례를 내었지. 내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성경은 죄에 대한 죄론을 이야기할 때 죄를 단지 개별적인 잘못된 행동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 불신과 자기 의존으로 보고 있습니다. 에덴 동산의 첫 죄 자체가 그렇습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내가 스스로 알아야 하는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무언가를 위기의 순간 나를 지켜줄 것이라고 믿고 붙잡을 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무언가를 내 존재 가치와 정체성을 확인시켜 줄 것이라고 믿을 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무언가를 불안할 때 궁극적인 안정감의 근거로 삼을 때 우리는 사실 에덴 동산에부터 이어진 그 질문 앞에 다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불신의 뿌리는 사실 에덴 동산에서부터 시작된 인류 첫 죄의 연장선에 내가 그냥 서가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 16절을 한번 같이 보겠습니다. 창세기 2장 16절로 17절을 제가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이미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라고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너와 나의 규칙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이 그들의 삶에 충분한 안내와 기준이 된다라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뱀이 다가와 던지는 질문이 뭔지 3장 1절을 보십시오. 거기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냐?"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렇게 속입니다. 3장 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다." 이 말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만으로는 부족하다. 너 스스로 알아야 진짜 완전해진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6절을 보십시오. 하와는 그 열매를 그 말을 듣고 그 열매를 볼 때 먹음직도 하고 보함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다라고 여겼습니다. 즉 그 열매는 하나님 말씀이 채워주지 못한다고 느껴지는 어떤 결핍, 더 많은 지혜, 더 많은 확신, 더 나은 자기 이해를 채워 줄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먹음직하고 보함직하고 지혜롭게 탐스럽게 할 만큼 탐스럽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왜 세상 말에 더 길을 기울입니까? 하나님 말씀보다 더 정확한 해답을 해 줄 것 같이 보이기 때문에, 내 인생을 훨씬 더 안정된 길로 이끌어가 준다라는 확신이 생기기 때문에 내가 그 열매를 따먹는 거예요. 그 말을 내가 들어버리는 거예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악가를 따먹은 행위 자체가 죄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 행위가 이르기 전에 이미 마음에 일어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그것이 더 무서운 죄라는 겁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 말씀이 자신의 삶에 충분하지 않다라는 믿음이 흔들렸다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을 충분하지 않다라고 했기 때문에 사단의 말을 듣고 싶은 것이죠. 여러분, 하나님 말씀이 충분하다면 세상의 말에, 유튜브의 말에, 어떤 강사의 말을 내가 더 신뢰하고 받아들이겠습니까? 아니지요. 당연히 하나님 말씀으로는 부족하다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내가 스스로 알아야 안전하다는 자기 확신으로 마음이 기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내 삶이 안전할 수 없다라는 겁니다. 내가 안전하다면 내가 알아서 내 안전을 지켜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 뭐죠? 우상을 세우는 거예요. 그래서 돈이 있어야 돼. 출세해야 돼. 직위가 높아야 돼. 잘 살아야 돼. 다 그겁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서, 즉 열매에서 그것이 주는 지혜, 완전함과 안정을 찾으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아닌 이 열매에서 내가 그것을 누려보겠다, 얻어보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단의 말을 듣고 먹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결과 아담이 행복했습니까? 결과 우리의 삶이 행복이라는 열매의 인생을 만들었습니까?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 말씀으로 족한 줄 아십시오. 다른 것에 대체 수단을 끼워놓지 마십시오. 그 결과는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다라는 삶의 결과를 보게 되는 것밖에 아니라는 것을 우리 알아야 됩니다.

이처럼 첫 죄의 뿌리는 말씀 불순종이기 이전에 말씀에 대한 불신이었습니다. 왜 말씀을 우리가 불순종하지요? 그 말씀에 대한 불신 때문에 불순종이 나오는 것이죠. 그 말씀이 믿어지는데 어떻게 불순종이 나오겠습니까? 불순종은 불신과 직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불신하기에 불순종이 나오는 것이죠. 하나님 말씀이라면 족하다. 하나님 말씀이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다는 것을 내가 불신하기 때문에 다른 등을 찾는 거 아닙니까? 그것을 불신하기 때문에 다른 빛을 내가 구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내가 믿는다라면 왜 다른 등이 필요해요? 다른 것을 왜 붙들어요? 다른 말에 왜 길을 기울어요? 여러분들, 불순종은 불신에서 나온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들.

그래서 그 불신의 결과로 인간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붙잡아 스스로 완전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닌, 하나님 말씀 아닌 다른 것을 붙잡고 내 인생을 완전하게 만들어 보려고 하는 겁니다. 행복한 인생으로 꿈꾸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만 살아봤으면 우리 알지 않습니까? 이제는 유턴해야 되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도 같은 자리에서 있습니다. 에덴 동산의 그 질문은 아담의 이야기 아니라 오늘 우리가 매일 다시 마주하는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내가 더해야 하는가? 형태만 바뀐 채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중요한 결정 앞에서 말씀과 기도로 충분한가? 아니면 점, 사주, 다른 조언이 더 필요한가? 마음의 불안 앞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이미 자녀된 것을 충분한가? 아니면 더 많은 성취와 인정이 있어야 안심이 되는가? 신앙생활의 확신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내가 더 많은 것을 행하고 증명해야 하는 것이 있는가? 이 모든 순간마다 우리는 사실 에덴 동산에 아담과 하와가 섰던 바로 그 자리에 다시 서게 되는 것입니다. 뱀이 하와에게 속삭였던 그것만은 부족해. 네가 더 가져야 해. 그 논리는 오늘도 우리 마음속에 똑같이 속삭입니다. 종류만 다를 뿐이지 우리는 열매를 똑같이 따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볼 때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럽게 할 만큼 손을 뺏고 싶을 만큼 붙들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무언가를 나를 지켜줄 것으로 붙잡으려 할 때 우리는 사실 에덴 동산에서부터 이어져온 그 질문 앞에 다시 서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 기억해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내가 더 해야 안심되는가? 형태는 바뀌었지만 그 속삭임 오늘도 우리 마음속에 똑같이 들려옵니다. 사단은 똑같이 우리에게 속삭이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충분하지 않다. 네가 이것을 먹어야, 이것을 붙들어야 네 인생이 완전해질 수 있다. 네 인생이 출세할 수 있고 네 인생이 행복할 수 있다. 끊임없이 속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 말씀보다 아담처럼 사단의 소리를 더 진리의 말씀처럼 듣고 살아가고 있지 않는지, 우리 이 시간 그냥 듣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우리를 다시 돌아보며 이 말씀이 우리의 울림이 되고 찔림이 되고 떨림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디모데후서 3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로 17절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내 생각이 안에 하나님께서 무엇이 참인지 말씀해 주는 걸 말합니다. 책망과 내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말씀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바르게 한과 말씀 밖으로 나간 나를 다시 바른 자리로 돌려놓는 것을 말합니다.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나니 하나님 말씀 아래 살아가도록 계속 훈련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앞에서 뱀은 하와에게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의미는 하나님 말씀을 벗어나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하나님께 의존하는 상태가 아니라 자기 충족적인 상태에 이를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뱀이 한 말의 핵심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 밖에서 그 경계 밖에서 온전함을 찾으라는 겁니다. 네 인생의 행복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로 말하고 있다라고 오늘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인간을 하나님의 사람답게 온전히 세우는 것은 말씀 밖에서가 아니라 오직 말씀 안에서 주어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멘.

님은 말씀 밖에서 스스로 온전해지라고 속삭였지만 성경은 오직 말씀 안에서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히 세워진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아멘. 그 밑에 있는 그러고 나서 바울이 4장으로 넘어가면서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4장 1절로 4절까지 보겠습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을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숙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써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말씀만이 우리를 온전케 하기 때문에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 전하라"고 합니다. 아멘. 말씀 전하라고 합니다. 말씀 못 얻는 때가 올 것이라는 것을 대답합니다. 그래서 범사의 오래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절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유를 이야기합니다. 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 전하라고 하느냐 하면, 때가 이르니 그 때가 이르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십시오.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리워서, 이것을 지격하면 간지름을 느끼는 귀를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진리 자체보다 감각을 자극하고 만족시켜 줄 무언가를 원하는 마음을 그들이 갖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는 신비한 체험도 있고 기복적인 것을 바라는 그 마음이 있다는 겁니다. 오직 자기 중심에 원하는 것을 듣고 싶어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른 교훈은 노라는 겁니다. 그래서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니라. 진리에서 돌이켜 버린다는 겁니다. 거꾸로가 버린다는 겁니다. 허탄한 이야기를 따른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를 못 들을 때가 있다. 네가 말씀을 전해도 듣지 않은 자들이 있다. 그래도 말씀 전하라는 겁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이 일은 사도 시대 이후 교회 역사 속에 반복되어 왔던 일입니다. 물론 주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더욱 심해질 수 있는 현상이지만, 이는 교회의 역사 전체에 걸쳐 반복되어질 패턴임을 이미 내다보고 바울이 한 말입니다. 말씀을 전파하라. 왜냐하면 사람이 바른 말씀을 듣지 않으려는 때가 오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반대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사람들이 듣지 않으면 입맛을 맞도록 바꿔야 하지 않느냐.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싫어하면 메시지를 좋아하는 패러다임으로 바꿔서 전하면 되지 않느냐? 그러나 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만 전하라는 것입니다. 아멘. 그 말씀만이 우리를 온전케 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만이 우리를 온전케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진리를 듣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오히려 진리를 전하는 일에 더 충실하라.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거부하는 이유를 귀가 가려웠다고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그래서 자기 욕망에 맞는 말을 해 주는 스승을 많이 선택한다고 했습니다. 결국 스승이 사람을 이끄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욕망이 스승을 선택합니다. 내가 스승이 내 인생을 이끌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요구합니다. 내가 요구하고 스승이 나를 따라오게 만듭니다. 오늘날 교회 실태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진짜 예수님이 단임 목사로 오고 사도 바울이 담임 목사로 오면 환영할 교회가 이 지구상에 몇 교회나 될까요, 여러분들? 거의 없을 것입니다. 왜요? 적당하게 살아도 하나님 축복해 주신 메시지를 듣고 싶어하지. 주님 같이 정직하게 살지 않을 때 "독사의 자식들아" 그러는 그 설교를 누가 듣고 싶어 하겠어요, 여러분들?

4절에 또 그 귀를 진리에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사람은 진리를 떠나면서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진리를 떠나면 결국 다른 이야기를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에서 길을 돌이키고 허탄한 이야기를 향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단순히 성경 말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정도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밀어낸 자리에 인간의 생각, 세상의 가치, 사조, 시대의 사조, 자신의 욕망에 맞는 이야기가 들어오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이게 문제라는 겁니다. 거기 어떻게 그 영혼이 살아날 길이 있고 그 인생이 살아날 길이 있느냐라고 오늘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이 온전케 하는 말씀을 버리고 자신의 귀를 즐겁게 해줄 허탄한 이야기를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의 그 오래된 거짓말이 시대를 따라 계속 새로운 옷을 입고 우리를 찾아온다는 겁니다. 구약의 눈에 보이는 형상, 그리고 이방 신들로, 1세기 히브리 성도들에게는 눈앞에 화려하게 펼쳐진 천사 신비와 기적의 현상으로, 중세 교회사에서는 성인 숭배와 유물 숭배로, 그리고 오늘 우리 시대는 훨씬 더 세련된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보십시오. 바른 교훈과 자기 사욕, 진리와 허탄한 이야기, 하나님 말씀과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 완전히 대조되고 있습니다. 나는 어느 쪽입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묻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내가 들릴 말이 없다면 그냥 하나님 말씀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자가 아닙니다. 그 빈 곳에 내가 채울 스승들을 귀를 즐겁게 해준 것을 찾습니다. 그래서 교인들 가운데 점 보러 가고 사주 보러 가고 타로 하러 가고 그러죠. 여러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에는 답이 없었는 걸 믿으십시오. 그래서 설교 제목이 "예수 그리스도로 충분합시다." 아멘. 예수 그리스도면 충분합니다. 여러분, 정말 예수 그리스도면 충분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네가 있어야 될 것이 무엇인지 내가 안다는 겁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거 아니냐?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더하시리라." 아멘. 우리는 주의 나라와 주의 의를 먼저 구하는 것이 아니고 더함의 목적을 위하여 우리는 예배 자리 나오고 하나님 앞에 절 상기는 모습을 드릴 때가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모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충분하시고, 말씀만으로 충분할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오늘날 교회 안에 교회 밖의 사람들이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 교인들 가운데 이런 마음들이 언연 중에 숨어들고 있습니다. 예수는 좋아하지만 교회는 부담스럽다. 예수는 좋지만 교회 다니는 것은 별로다. 성경 말씀보다 내 마음에 이끄는 대로 그냥 하나님을 내가 느끼고 싶다. 이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예수 이름을 붙잡으면서도 실제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다는 겁니다. 말씀이 이야기하는 말씀이 하나님이 아니고 내가 그리는 내 프레임 안에서 하나님 만나고 싶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이름을 붙잡으면서도 실제로는 말씀의 권위, 교회 공동체, 정해진 신앙의 훈련 이런 것은 다 회피하고 자기가 편한 방식의 신앙만 취하고 싶어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2,000년 전에 경고했던 그 패턴이 오늘 우리 시대 조금 더 세련된 옷을 입고 대풀이될 것밖에 아닙니다. 우리는 이러한 태도가 나타나는 것에 대해서 경계할 줄 알아야 됩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이 육신의 삶이 끝난 날 내가 살았던 나의 삶이 내 영원한 삶을 결정해 줍니다. 그것도 내가 하나님 말씀보다 내 생각을 프레임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 믿는다라면, 그 내가 만든 프레임이 결국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우리는 보게 되어질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히브리서 1장 7절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 준 결국은 이것입니다. 바람은 아무리 강해도 결국 지나가고 불꽃은 아무리 뜨거워도 결국 사라진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좌는 영원하다는 겁니다. 불꽃은 화려해 보이나 결국 재만 남습니다. 세상의 바람과 불꽃을 쫓는 허한 삶을 쫓지 말라는 겁니다. 오직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보좌에서 공의로 통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 온전히 붙드는 참된 성도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새벽이슬교회가 귀하고 자랑하고 싶은 내 인생의 축복인 교회로 여겨지십니까? 그렇다면 그 이유가 새벽이슬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고 인격적으로 그분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내가 새벽이슬교회를 만난 것이 내 인생의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에 이 교회를 내가 사랑할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됩니다.

오늘 우리는 오늘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내 신앙 생활 속에서 엄밀히 자리 잡은 또 다른 중재자가 없는지 묻고 있습니다. 내 귀는 지금 무엇에 가리워지고 무엇을 듣고 하는지 묻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엄밀히 궁극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대상은 무엇이라고 말씀하는지 묻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정직하게 돌아보고 다시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충분할 수 있도록 돌아오게 하는 은혜의 초청입니다. 결국 신앙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충분하다는 믿음 위에 세워집니다. 바람과 불꽃 같은 것들이 붙들고 흔들리면 흔들리면 살아온 우리의 마음을 오늘 이 자리에서 정직하게 우리는 내려놓고,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보좌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한 분만으로 충족하다고 다시 고백하며 붙드는 새벽이슬교회의 모든 성도가 다 될 수 있기를 이 아침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스터디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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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정리

  •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중보자로서 충분해야 한다.
  • 천사들은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그 자체로는 부족하다.
  • 우상 숭배는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본능적 성향이다.
  • 오직 성경이 진리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나눔 질문

  1.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에서 충분하다는 것을 어떻게 경험하고 있나요?
  2. 우리가 의지하는 다른 중재자나 기준은 무엇인가요?
  3. 우상 숭배의 현대적 형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4. 어떻게 하면 오직 성경의 권위를 회복할 수 있을까요?

이번 주 적용

이번 주에는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성경을 통해 그 진리를 다시 확인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기도 · 묵상

하나님, 우리의 마음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집중되게 하시고, 성경의 진리를 통해 우리의 신앙을 더욱 굳건히 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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